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정답 찍기 로봇' 만드는 한국 시험] [上] 객관식만 가득… 창의력이 죽어간다

주관식도 단답형으로 출제 학생들, 무조건 외우기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춰 공부할 수밖에"

# 지난 10일, 서울 신길동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지연이(11)가 방에서 사회 공부를 하고 있었다. 5학년에 올라가는 지연이는 먼저 문제집의 '교과서 요약'을 외우고 나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모두 '불쾌지수가 가장 높은 달(月)은?' 같은 단답식 문제들이다.

막힘 없이 문제를 풀던 지연이가 '농촌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서술형 문제가 나오자 그냥 넘어갔다.

"시험에 이런 문제는 안 나와요. 안 나오는 걸 왜 풀어요?"

지연이는 평소 이런 식으로 공부한다. 시험 문제가 모두 선택형(객관식)이거나 단답식이기 때문에 최대한 열심히 외우고 문제를 많이 풀어본다.

# 오는 21일 공개채용 서류접수를 마감하는 게임업체 한빛소프트는 올해 처음 '창의력 면접'을 도입했다. 서류 항목에 학력·성적·나이 등 '스펙'(객관적인 조건)을 볼 수 있는 항목은 모두 없애는 대신 자신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도록 형식과 분량에 제한 없는 '포트폴리오'를 추가한 것이다. 면접에서도 '문제 해결 능력'을 주로 테스트한다.

한빛소프트가 이런 채용방식을 도입한 것은, 학업 성적이 훌륭해도 실전에서 자기주도적으로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면접에서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만 달달 외워 읊는 구직자도 많았다. 한빛소프트 윤복근 홍보팀장은 "학업 성적이 좋은 것과 창의력이 일치하지 않는 적이 많더라"고 밝혔다.

지연이가 시험에서 틀린 문제의 정답을 그대로 따라 쓰고 외우는‘오답노트’를 작성 하며 공부하고 있다. 지연이네 학교 시험 문제는 모두 선택형 혹은 단답형이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선택과 단답형만 있는 시험

기업과 대학은 '창의력'을 21세기 인재(人材)의 필수 조건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암기 위주의 기계적인 학습만 반복한 학생들은 '창의력 고갈'을 겪고, 기업은 창의력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학교 시험 문항이 대부분 선택형이나 단답식이다 보니 지연이처럼 '정답 찍기'나 '외우기' 실력만 연마하는 것이다.

취재팀이 서울과 경기도 지역 중학교 16곳을 무작위로 골라 작년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국어 문항을 분석한 결과, 서술형 비중이 전체의 30%를 넘는 곳은 3곳(19%)뿐이었고, 서술형 문제가 아예 하나도 없는 곳이 4곳(25%)에 달했다. 사회 과목 역시 서술형을 아예 출제하지 않은 곳이 5곳(31%)이었고, 나머지 학교는 대부분 서술형 비중이 30% 미만이었다.

대부분 학교는 주관식 시험도 '단답형'으로 출제하고 있었다. '진시황제 때 전국에 황제가 직접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게 한 통치제도는?'(서울 K중학교) 같은 식이다.

'무늬만 서술형'인 문제도 많다. '훈민정음이 한문보다 익히기 쉬운 이유를 윗글 (가)에서 찾아 쓰시오'(서울 Y중학교)처럼, 규칙을 제시하는 식이다.

숫자만 외우고 원리는 몰라

전문가들은 선택형·단답형 위주 시험에 익숙한 청소년들이 사고력·창의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의견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 M고 최모 교감은 "수업 시간에 질문하거나 의견을 말하는 학생은 거의 없고, 반성문조차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써놓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아이에게 '하루 중 오후 2시가 가장 더운 이유는 뭐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대답하기에,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시간은 몇 시냐'고 물었더니 '2시'라고 대답하더라"며 "시험에 나온다고 무작정 '2시'라는 숫자만 외우니까 정작 원리는 이해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 신뢰하는 문화 이뤄져야

교사들은 선택형·단답형 문제를 주로 내는 데 대해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항변한다. 서술형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알지만, 학생·학부모로부터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경기도 한 중학교 사회교사 김모(26)씨는 "주관식 문제를 내면 꼭 항의하는 학생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아예 안 내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 김창환 선임연구위원은 "교사의 평가를 학부모·학생이 믿고 받아들이는 신뢰 관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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